6.25 전쟁 이야기 2 : 전개 과정
작전명 <폭풍>, 그리고 <Chromite>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작전명 ‘폭풍’, 북한군은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하였다. 러시아로 부터 지원받은 대량의 전차포와 자주포, 야포에서 불이 뿜어졌다. 때마침 많은 수의 남한의 병력들이 주말이라 외출을 나간 상황이라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작전이었다. 한 달이 채 지나기 전 북한군은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체 지역을 점령하였다.

북한군의 주력 전차 T-34 <출처:국가기록원>
UN은 북한의 침략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한국에 UN군을 파견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UN은 더글라스 맥아더를 UN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쟁에 파견한다. 맥아더 장군은 이전에도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을 승리를 이끎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으로 평가 받고 있던 터였다.
어느 전쟁이든 보급로가 끊기게 되면 전세는 반드시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맥아더의 UN군은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 놓음으로써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한 지역에 진출한 북한군을 고사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바로 ‘인천상륙 작전’이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 장군 본인 외에는 누구도 그 작전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UN에서는 실패할 작전이라 판단하고 반대도 심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 앞바다에는 갯벌과 작은 섬들이 많이 분포 돼 있어 대규모의 함선들이 진입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맥아더가 직접 지휘하는 UN군은 인천 주변에 주둔해 있던 북한군과 총력전을 벌였다. 몇몇 섬들이 지도상에서 사라질 정도의 대규모 화력전을 진행하며 인천상륙작전을 보기좋게 성공시켰다. 1950년 9월 15일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약 한달간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 놓은 것은 물론, 북한군을 압록강(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는 강) 부근에 까지 후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곧 6.25전쟁이 끝날 수 있는 상황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UN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당시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중국 공산당의 대두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잠시 휴전(국공합작)을 해온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영토 중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지역에 대한 배분문제를 가지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내전을 시작(1946년에 시작된 제2차 국공내전)하게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이 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을 중국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내어 버리게 된다. 이로써 중국 역시 사회주의 국가의 길로 들어 선 상황이었다.
중국의 경계부근까지 북한군을 몰아낸 UN군은 고민이 생겼다. 만약 북한군을 한반도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된다면 중국과 소련군의 참전이 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6.25 전쟁으로 촉발된 전쟁이 자칫 세계 3차대전으로 까지 확전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러시아로서는 북한 지역을 미국과 연합국으로 부터 반드시 지켜야할 중요한 지역으로 보았다. 만약 북한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들의 안보적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는 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확장과 자신들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는 북한지역이 중요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하리라 내다보았던 것이었다.
중공군 6.25 참전
1950년 10월 25일 우려했던 대로 중국의 공산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넘어온 중공군(중국 공산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인해전술, 말 그대로 끝도 없이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의 숫자에 연합군의 화력은 무용지물이었다. 한국군과 UN군은 후퇴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1950년 12월 15일 부터 동월 24일까지, 한국군과 UN군은 그들을 따라 몰려든 피난민들을 실어 흥남 부두(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한 항구. 노래 ‘굳세라 금순아’, 영화 ‘국제시장’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곳)를 통해 부산으로 후퇴를 진행한다.
흥남 철수작전 당시 흥남 부두에는 수 많은 피난민들로 북세통을 이루었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의 체제를 거부했던 사람들, 일부는 UN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던 사람들, 일부는 그저 자유를 찾아 피난을 가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가족에게 작별의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로 넘쳐났다.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였다. 현재는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별한 가족들을 그리워 하며 고인이 되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시기에 흥남에서 유입된 인파들로 인해 부산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한국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다.
피난민들에게 있어서 부산에서의 삶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피난민들 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판자를 주어다가 집 비슷한 건물을 지어서 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집을 구하지 못해 길바닥에서 생활하고 UN에서 지급해 주는 음식으로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부산의 동구 수정동 판자촌, 사하구 감천동 판자촌 등과 같이 유독 부산에 판자촌이 많이 형성 되었던 것도 이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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