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한국 전쟁 배경
ㄱ. 이데올로기의 대립
한국은 유일하진 않지만 세계의 몇 안되는 분단국가 중 하나이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전쟁으로 한국은 두 개의 국가(헌법 3조 영토조항에는 북한도 우리나라로 규정이 돼 있긴하나 1991년에 남한과 북한이 UN에 동시에 가입함으로써 분단된 두개 국가의 현실을 반영함)로 분단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이념적 대립에 의해 발발했던 것이었다. ‘자유냐, 혹은 평등이냐?’와 같은 이념적 대립 말이다. 나를 포함한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다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선한 가치들이 충돌할 때도 있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립은 한국전쟁 또는 6.25전쟁으로 발전했다.

ㄴ. 38도선
2차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추가로 투하했다. 이 것으로 태평양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완전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한편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의 피날레 역시 자신들이 장식하길 원했다. 러시아는 한반도 북쪽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점차 남쪽으로 몰아갔다. 이를 지켜 본 미국은 초조해져 갔다. 자신들이 다 끝내놓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이 자신들의 전리품(한반도 땅)을 주워담고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소련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게 해서는 안된다고 느꼈다.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던 병력 일부를 한반도의 남쪽으로 파견했다. 러시아의 계속되는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미국과 러시아는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사분계선을 긋고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서약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 葵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함으로써 세계 2차 대전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2. 두 개의 체제
19세기 말 공산주의 혁명은 세계를 휩쓸었다. 세계 전역의 많은 사람들이 부도 없고 빈곤도 없는, 만인이 평등한 유토피아적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반도의 북쪽으로 몰려들었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반대로 한반도 남쪽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따위와 같은 이념에 대해서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념대립은 순진무구한 한국민들에게는 그저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우선적으로 38선 부근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가장 먼저 불편을 느껴야 했다. 마을이 둘로 쪼개져 생계를 위해서 매일 38선을 넘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ㄱ. 이승만의 귀환

남한은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한 친미주의자였으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미국사회에서의 폭넓은 인맥을 통해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남한의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었고, 이로써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두 개의 체제로 쪼개졌다.
ㄴ. 김일성의 귀환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한 달 뒤, 북한 지도자로서 준비활동을 하고 있었던 김일성이 러시아에서 돌아왔다. 그는 스탈린의 지명하에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고작 33세에 불과했다. 그는 젊었고 야심만만했다. 그가 북한의 지도자가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토지개혁이었다. 그는 지주로 부터 땅을 무상으로 몰수한 뒤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주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북한의 주민들은 김일성에 대한 지지가 갈수록 커져갔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남한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남한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했고 사적 소유가 가능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38선 부근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이따금씩 교전이 벌어지곤 하였다. 남북이 서로 주둔지로 활용할 만한 넓고 폐쇄된 지역과 적의 주둔지를 감시하기 좋은 고지대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량의 살상행위가 벌어졌던 한국전쟁의 규모에 비하면 가벼운 수준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한국 전쟁 (2) : 전쟁 과정>에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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